이야기

Story

홈 > 활동 > 이야기



이야기

Wooyang Story

 > 활동 > 이야기

북한에서 남한으로, 그리고 아미쉬 마을에서 다시 서울로_ 한 탈북 청년의 긴 여행

2021-01-02


살아간다는 것은 예상치 못한 풍경들과 마주치는 여정인 것 같다. 북한을 떠나 서울에 정착한 지 십년도 훨씬 지났지만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스치는 시선들도 낯설고 차가왔다. 그래서 가끔 나만의 피난처를 찾고 싶었다. 그러던 중 이삼년전 코로나가 아직 세상을 덮치기 전 어느 날 갑자기 미국행 티켓을 사서 장장 3개월 간의 여정을 떠나게 되었다.


아무 기대도 없이 뉴욕행 티켓을 들고 비행기에 막연히 올랐다. 내 좌석 앞 줄에는 중동 사람들도 여러명 앉아 있었는데 태평양 어디쯤을 지날 때 비행기가 폭파되는 꿈인지 희망사항인지 알 수없는 헷갈림이 이 잠시 스쳤다. 불안하거나 두렵기 보다는 무감각했다.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몇 번 겪어봤기에 어느정도 익숙했다. 북한에서의 삶은 힘들었지만, 남한에서의 삶도 쉽지는 않았기에 어떻게 생각하면 비행기가 추락하면 모든게 끝나고 더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더 이상 굶주림과 수용소의 공포에 시달리지 않겟지만, 경쟁이 심하고 성공이 아니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남한에서 삶도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그 당시의 나는 하는것마다 낯설고, 실패자인 것 같았고,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 혼란하기만 했다.


약 13시간동안 6,800마일을 달려 항공기는 케네디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또 하나의 큰 관문이 남아 있었다. 바로 공항을 통과하는 일이다. 당시는 미국은 불법 체류자들이 많아 입국절차가 까다로웠다. 목적이 불분명한 사람들은 바로 출국시키기도 했다. 사실 미국행을 계획할 때부터 내내 걱정하던 일이었다. 드디어 보안검색대 수사관 앞에 내 여권과 티켓을 내밀었다. 백인 경찰관은 웃으면서 미국에 온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 Why did you come to the United States?"라고 물었다. 이 질문이 이렇게 무섭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온 몸이 사르르 떨렸다. 그러나 태연한 척하면서 유창하지 않은 나의 영어로 성의있게 답했다. 공항 수사관은 내 눈을 끈질기게 바라보더니 좋은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며 입국을 허용했다. 공항 게이트를 빠져 나오는 순간, 탈북하려고 두만강을 넘을 때처럼 온 몸을 녹이는 듯한 긴장감이 쭉 빠져나갔다.


© 월스트릿이 보이는 브루클린 덤보에서. 매일 저녁 이곳에서 하루와 작별했다.


성공만 쫓던 남한땅을 회피하고 이제 나는 현대문명의 최고 성지라고 불리는 뉴욕 맨해튼에 있다. 북한에서 반미 교육을 받고 전쟁을 위한 군사훈련도 받았기에, 미국에 발을 딛는 순간 긴장감도 잠시 맴돌았다. 하지만 이런 과거의 이데올로기는 눈부신 화려한 풍광들 앞에서 별 위력이 없었다. TV에서만 봤던 유명 명소들이 나의 관심과 시선을 마구 끌었다. 하지만, 나는 거기서 뭔가를 찾을 수는 없었다. 내 마음은 여전히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짧은 뉴욕 구경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펜실베니아로 향했다. 나의 최종 목적지는 중년의 백인 부부가 있는 허딩턴 지역이었다.


© 미 대법원에서 동성애 합법 판결이 된 그 해  뉴욕은 축제의 장이었다(아) 센트럴파크 (위)


펜실베니아 스테이트 칼리지 약속 장소에는 지인의 부모님이 픽업하러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중년의 백인 내외와 함께 앞으로 3개월을 살아야 했다. 서울이나 뉴욕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펜실바니아의 농촌은 북한처럼 고층 빌딩도 없고, 가게를 가려면 차를 타고 한참 가야 했다. 그래도 이 곳이 이상하게 너무 편했다. 나를 아는 사람도, 나같은 유색 인종도 없었다. 오직 백인들만 사는 오래된 마을이었다. 낯설었지만, 마음이 편했다.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않고 완전한 무관심 속에 있다는 것이 이상한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 3개월 간 함께 생활했던 톰과 샤론. 나를 자식처럼 친근하게 대해주던 사람들. 


© 글렌다 부부와 그의 손자 소녀들, 나에게 더없이 친절했던 그들의 표정을 평생 간직하고 싶다. 


그러다 우연히 한 무리의 이상한 복장을 한 사람들과 마주쳤다. 바로 아미쉬라는 종교 집단이었다. 18세기의 모습 그대로의 삶을 살고 있었다.  마치 북한의 어느 시골에서 본 것 같은 광경이었다. 경쟁만이 살아남는 시대에 아직도 수백년 전의 삶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삶이 신비하게 다가왔다. 이들은 자녀들의 학업도 중학교까지만 받게한다. 이후부터는 남자는 아버지를 따라 일을 배우고, 여자는 어머니를 따라 다니면서 일을 배운다. 그리고 어떤 농기구나 비료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본인의 노동력과 가축들들만을 이용해서 일하고 농사를 짓는다.   그뿐아니라 어떤 전기 기구나 자동차 심지어 TV나 라디오도 사용하지 않는다. 복장도 옛날 복장 그대로이고 삶도 그대로이다.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북한보다 더 오래된 과거를 지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북한과는 다르게, 자유와 종교적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삶을 지켜가는 것이 특별했다.


나도 모르게 이들의 삶에 심취하게 되었다. 이들의 생활은 북한을 연상케했다. 이러한 삶의 형태에 대해 실패했다고 여기고 멀리 미국까지 도망치다시피 왔는데, 아미쉬 마을 사람들은 그런 나를 위로하듯이 다가왔다. 그들의 삶은 마치 소중한 것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누구와 꼭 같아져야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속도로 일단 살아도 괜찮다고 천천히 내게 이야기 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아미쉬 복장을 한 사람들을 만나면 마음이 편해지고 동질감도 갖게 되었다.


© 할머니와 손녀의 교감은 이방인의 시선과 관심을 사로잡았다.


아미쉬 마을 사람들을 보면서 삶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누군가는 현실의 삶이 죽을 만큼 싫어서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데, 누군가는 아직 과거의 신앙과 전통을 계속 자랑스럽게 이어가고 있었다.  


© 아미쉬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 어떤 날은 하루종일 그들을 바라볼 때도 있었다. 마냥 즐거웠다.


남한에서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치던 내가 미국행 티켓을 구입한 것은 서울에서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남들보다 부족한 자존감이 나를 계속 사지로 내몰았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자아를 위협할 만큼 위태로웠다. 북한에서 왔다고 말하기 힘들어서 나는 사람들을 피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말하기가 어려우니, 사람들을 제대로 만날 수가 없었다. 

 

완전히 낯설지만 어떤 면으로는 이상하게 익숙했던 느낌의 아미쉬 마을에서 내가 알게 된 것은 이것이었다. 죽음도 감수하며 살겠다고 찾아갔던 남한 사회에서 내가 그토록 힘들었던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나 자신에 대한 공감이 없었고, 왜 남한 사람들처럼 하지 못하는지 다그치기만 했고, 북한에서 왔던 나의 과거를 인정하기 어려워했다.


© 현대문명을 자랑하는 미국에서 이렇게 마차를 이용하는 것은 사실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런 나를 다독여 준것이 바로 아미쉬들의 삶, 그 자체였다.  남들보다 조금 느려도 괜찮고, 달라도 괜찮았다. 스스로에 대한 위안과 위로가 없었기에 모순의 연속이었던 것이었다. 남한사회에서 다들 달려야 한다고 말할 때, 꼭 같은 속도로 달려야 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는 그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나의 속도가 있고, 나의 과거가 있고, 그것이 남한 사람들과 좀 다른 것이어도 괜찮은 것이었다. 나는 그들과 다른 것이었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 와서 십 수년, 학교도 졸업하고, 여기저기 떠돌고 일용직부터 다양한 일을 했다. 그 십수년 동안 지독하게 외롭고 단 한번도 마음이 편할 날이 없었다. 북한에서 왔다는 것도 이야기 안 하고 가능하면 북한을 잊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최근에 낮에는 일하면서 주말과 야간을 이용해 대학원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학문에 대한 연구나 관심이 생긴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일조한다는 거창한 결심도 아니었다. 



© 초원을 누비는 생명들에게는 자연이라는 최고의 선물이 주어진다.


그냥 이제서야 조금 내가 살아왔던 시간과 앞으로 살 이 남한 사회와 공감하고 소통할 의욕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성의있게 사회와 직면하고 싶어진 것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말처럼 내가 소중히 여길 수 있는 가치들을 더 살펴보고 싶었다. 그동안 겪었던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던 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 화해와 위로를 건네고 싶어진 것이다. 

 

인생이라는 여행은 시간적으로는 제한이 있지만, 계획되지 않는 다큐멘터리와도 같기에 미래는 알 수 없다. 나에게 다가올 시간을 나는 이제 이 남한 땅에 두 발을 딛고 나만의 이야기로 채워가고 싶다. 시간의 흐름에 아랑곳 없이 수백년의 전통을 이어가는 아미쉬들처럼, 이제… 흔들리지 않는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

 

* 이 글을 쓴 이한림(가명)씨는 십수년전에 북한을 떠나 중국과 몽골을 거쳐 남한으로 왔습니다. 대학시절 우양재단의 나래 장학생이었으며,  현재는 비영리단체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지난 여름 그리고 겨울에 우양재단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고, 최근에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자 우양재단에 후원을 시작했습니다.  사진 찍기를 사랑하고, 순간의 아름다움에 민감한 시선을 가지고 있고, 탁구를 칠때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앞으로 가능하면 북한 관련 분야에서 일하고 싶은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